
책을 읽다 보면 문득 그런 인물이 있다. 현실에선 결코 되고 싶지 않으면서도, 왠지 마음 한편이 저릿해지는, 부러움과 연민이 동시에 드는 인물.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Knulp)』는 그런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을 품고 있는 이야기다. 그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려 하지 않으며, 길 위에서 삶을 보낸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동시에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바로 그 ‘크눌프’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나는 크눌프라는 인물의 삶이 너무도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사랑을 놓치고, 일도 하지 않으며, 병든 몸으로 방랑하는 그의 삶은, 현실에선 파멸에 가까운 삶이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그가 과연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됐다. 그는 외롭지만, 고요한 평화를 가지고 있고, 가난하지만 여유가 있었다. 그는 세속의 기준으로는 실패했지만, 자신만의 기준에서는 분명 자유로웠다.
떠도는 자의 아름다움, 『크눌프』를 읽고
크눌프는 모든 규범과 질서로부터 한 발짝 비켜서 있다. 그는 가족을 이루지도 않고, 직업을 갖지도 않으며, 어딘가 정착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길을 따라, 계절을 따라 움직이며 친구 집에 얹혀살고,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삶을 산다. 얼핏 보면 무책임하고 무계획한 인생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인간적인 따뜻함과, 사물과 자연을 바라보는 고요한 시선은, 어떤 면에선 누구보다 ‘깊이 있는 삶’이다.
그는 누구보다 삶의 감각에 예민하다. 길가에 핀 들꽃, 맑은 공기, 산의 능선, 사람들의 말투. 작은 것에 마음을 움직이고, 그 속에서 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현대 사회가 소비와 효율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지금, 이런 삶은 일종의 저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말없이 묻는다. "당신이 사는 삶은 정말 당신이 원하는 삶인가요?"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크눌프를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는 ‘자유’였다. 그는 직장도 없고, 가족도 없으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런 삶을 방황이라 부르겠지만, 그는 정착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속박되지 않는 삶’을 택한 것이다. 크눌프는 사랑을 두려워하고, 책임을 회피한다. 하지만 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사랑했고, 자신의 책임을 직시한다. 삶에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우리와 다를 뿐이다.
그는 늙고 병든 자신의 몸을 보며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과 대화하는 장면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경건함이 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던져진 이유가 사람들에게 삶의 기쁨과 자유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다. 나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외로움 속에서도 ‘나는 이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그의 고백이 너무도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크눌프는 있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크눌프를 생각했다. 그는 정말 실패한 삶을 살았을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미처 용기 내지 못해 선택하지 못한 삶을 살아낸 사람일까? 나는 후자라고 믿는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타협하고 살아가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여전히 자유를 향한 동경이 있다. 그리움, 여백, 따뜻함, 쓸쓸함, 이 모든 감정이 크눌프라는 인물에게 녹아 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에는 정답이 없어. 길 위에서 피는 들꽃처럼,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
헤르만 헤세는 『크눌프』를 통해 우리에게 단순히 ‘떠도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감수성과 여백, 그리고 고독의 미학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정말 이 삶이 당신이 원했던 삶인가요?”
결론: 크눌프는 떠돌지만, 중심은 지키고 있었다
『크눌프』는 고요한 책이다. 격렬한 사건도 없고, 빠른 전개도 없다. 하지만 그 속엔 삶의 본질을 흔들어 깨우는 묵직한 울림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삶을,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크눌프다. 어쩌면 그를 따라서, 길 위에서 다시 나를 찾을 용기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