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이야기하며 이 문장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너무 유명해서 진부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문장은 인간의 본질적인 질문을 품고 있다. 삶과 죽음 사이, 행동과 망설임 사이, 선과 악 사이. 햄릿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의심하고, 고뇌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끝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왜일까? 나는 이 질문에 오래 머물렀고, 그 결과 『햄릿』이라는 작품이 단지 고전 비극이 아닌, 인간 실존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문학적 탐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햄릿 "죽느냐, 사느냐",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햄릿』은 표면적으로는 복수극이다.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삼촌 클로디어스를 응징해야 한다. 유령으로 나타난 선왕의 명령은 분명하다. "복수하라." 하지만 햄릿은 칼을 뽑지 않는다. 그는 주저하고, 질문하고, 다시 되묻는다. “복수는 정의인가? 살인은 살인을 정당화하는가? 나는 왜 이토록 행동하지 못하는가?”
이 지점에서 햄릿은 단순한 복수극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는 자기 내면의 윤리와 충동 사이에서 갈등하는 철학적 인간이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영웅적 행동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시대를 역행하며, 자기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한다. 나는 그런 햄릿이 너무도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모두, 말하자면 햄릿처럼, 어떤 선택 앞에서 망설이고, 스스로를 의심하며, 결국 너무 늦게 후회하는 존재니까.
“행동”의 비극 – 지성은 왜 우리를 묶는가
햄릿의 가장 큰 특징은 ‘머리로 사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 한 장면에서 그는 클로디어스를 죽일 기회를 놓친다. 기도하고 있는 그를 보며, “지금 죽이면 그 영혼이 천국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며 살인을 미룬다. 복수조차 계산되고, 정당화되어야 하며, 그 안에서 그는 계속 머뭇거린다.
나는 이 장면에서 현대인의 초상을 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고민하며,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SNS로 가득한 세상에서 정의는 언제나 상대적이고, 판단은 보류되며, 확신은 쉽게 사라진다. 햄릿은 그런 ‘지성의 비극’을 먼저 겪은 인물이다.
지식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지식이 인간을 옭아맨다. 햄릿은 세상의 구조를 너무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 안에서 ‘선한 선택’을 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오히려 단순하고 충동적으로 사는 이들 – 레어티즈, 폴로니우스, 클로디어스 – 그들은 생각 없이 움직였고, 결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햄릿은 결과보다 의미를 중시했고, 그 과정에서 파멸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비극 아닐까?
광기와 가장 – “나는 미친가, 아니면 미친 척하는가”
햄릿은 복수를 계획하며 ‘미친 척’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 척이 언제부터 진짜가 되었는지, 우리도, 햄릿 자신도 알 수 없다. 그는 친구 호레이쇼 앞에서는 논리적이고 침착하지만, 연인 오필리어 앞에서는 모욕적이고 광기 어린 말을 쏟아낸다. 그는 광기라는 가면을 쓰지만, 결국 그 가면이 그의 본모습을 삼켜버리는 듯하다.
여기서 나는 ‘사회 속 자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가장된 자아’를 쓰고 살아가는가?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직원, 집에서는 좋은 자녀, 친구들 사이에선 재미있는 사람. 이런 가면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 자아가 어디 있는지조차 헷갈려진다. 햄릿이 미쳐가는 과정을 보며, 나는 현대인이 겪는 정체성 혼란의 원형을 본 것 같았다.
오필리어 – 순종이 강요된 여성의 죽음
『햄릿』에서 오필리어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폴로니우스의 딸, 레어티즈의 동생, 햄릿의 연인이지만, 그녀 자신의 목소리는 없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햄릿의 사랑을 의심하고, 오빠의 충고에 따라 몸을 조심하며, 햄릿의 냉대로 상처를 입고 결국 물속으로 사라진다.
오필리어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순종’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에게 요구되던 역할의 끝이었다. 그녀는 그 역할을 벗어나지도 못했고, 거부하지도 못했기에, 오직 ‘소멸’이라는 방식으로만 현실을 떠날 수 있었다.
나는 오필리어를 떠올릴 때마다 안타까움과 분노가 교차했다. 햄릿은 자신의 고뇌를 대사로 쏟아내지만, 오필리어는 침묵 속에서 무너진다. 그녀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많은 ‘오필리어’들이 겪는 침묵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고 느낀다. 햄릿만큼이나, 오필리어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죽느냐, 사느냐” –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삶의 방식
햄릿의 유명한 독백, "To be, or not to be", 우리는 그것을 ‘자살을 고민하는 대사’로만 이해해왔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장은 훨씬 더 깊은 층위를 갖고 있다. 그것은 단지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햄릿은 이 질문을 던지며, 삶의 의미를 고민한다.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이 고통을 거부하며 사라지는 것이 나은가? 삶이란 고통의 연속이고, 죽음 이후의 세계는 불확실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이 삶을 견뎌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이 너무도 현실적이고 무겁게 다가왔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가끔은, 그 고통이 삶을 압도할 만큼 커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햄릿의 독백은 그런 인간 존재의 가장 밑바닥에서 피어나는 절박한 질문이다.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단, 삶의 방식이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매일 ‘죽느냐, 사느냐’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결말 – 피로 씻겨나간 세계, 그러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햄릿은 결국 클로디어스를 죽이고, 레어티즈와 함께 죽는다. 거트루드는 독살되고, 왕국은 무너지고, 모든 주요 인물들이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이 죽음들은 정의의 승리도, 질서의 회복도 아니다. 오히려 이 비극은, 고통을 끝내지 못한 고통의 기록이다.
죽음이 너무 많고, 의미는 희미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호레이쇼만이 살아남는다. 그는 햄릿의 친구이자 유일한 목격자다. 햄릿은 죽기 전 호레이쇼에게 말한다. “내 이야기를 전해다오.” 나는 이 대사를 읽으며 소름이 돋았다. 결국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토록 혼란스럽고 모순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누군가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며 – 햄릿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있다
『햄릿』은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끊임없이 해석되고, 다시 공연되며, 그 의미가 확장되어왔다. 하지만 그 모든 해석을 넘어, 내가 이 작품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햄릿은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처럼 망설이고, 그처럼 의심하며, 그처럼 후회한다. 우리는 때로 미친 척하며 버티고, 진짜 미쳐버릴 만큼 괴롭다. 우리는 오필리어처럼 침묵 속에 잠기고, 호레이쇼처럼 지켜보는 일만 남는다. 『햄릿』은 인간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인지를, 아름답고도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래서, 이 작품은 고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숨 쉬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다. 햄릿은 단지 셰익스피어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 안에서 망설이고 있으며, 매일같이 "To be or not to be"를 속으로 되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