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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 마음을 키우는 편지, 자유로 가는 소녀의 여정

by rya-rya-day 2025. 4. 10.

키다리 아저씨 책 관련 사진
키다리 아저씨 책 사진

세상에는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이 있다. 이야기의 구조가 튼튼하지 않아도,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아도, 그 안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성장과 고백을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는 바로 그런 작품이다. 유쾌한 말장난과 위트, 때로는 뾰족한 진심이 묻어난 편지들이, ‘제루샤 애벗’이라는 한 소녀의 삶과 그 안의 인간적인 떨림을 가감 없이 전해준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그냥 ‘귀엽고 따뜻한 이야기겠지’라고 생각했다. 고아 소녀와 후원자, 그리고 그 사이에 오가는 정겨운 편지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이 이야기는 단순한 동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독립적인 정체성을 찾아가는 주체적인 인물의 성장 기록이자, 한 시대의 젠더 구조에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저항하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키다리 아저씨』 – 마음을 키우는 편지, 자유로 가는 소녀의 여정

주인공 제루샤 애벗(줄리)이 키다리 아저씨에게 처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녀는 자신의 삶을 비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고아원에서 자랐고, 주어진 것만으로 살아왔지만, 그녀는 독서를 통해 세상과 접속하고, 자신만의 유머와 시선을 잃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녀가 '쓰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녀의 편지들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 감정, 질문, 반항, 유쾌함, 그리고 내면의 흔들림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글쓰기’ 행위다. 말하자면, 줄리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 다시 말해 ‘글’을 통해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묘한 감동을 느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진심을 담아 매일매일 자신의 세계를 정리해 나가는 그녀의 편지들은, 단지 누군가에게 보내는 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 글쓰기의 여정은 곧 자아의 성장과 연결되어 있다.

‘키다리 아저씨’는 누구인가 – 보이지 않는 권력, 그러나 따뜻한 시선

줄리의 편지를 받는 ‘키다리 아저씨’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는 후원자이자, 감시자이며, 동시에 수수께끼다. 그렇기에 줄리의 편지들은 일방적인 독백이자, 고백이고, 또 자기 안에서의 대화다.

재미있는 것은 줄리가 점점 더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할수록, 그녀가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의 어조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감사와 예의, 기쁨이 중심이었다면, 나중엔 반항과 투정, 때로는 도전적인 의견이 담기기 시작한다. 그녀는 단순한 수혜자에서 점점 자신의 의견을 갖춘 주체로 변모한다.

이것은 마치, 사회가 여성에게 주었던 ‘선의의 보호’라는 이름 아래 숨은 권력 구조를 해체하는 과정처럼 보였다. 줄리는 키다리 아저씨를 존경하지만,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때로는 그와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 ‘키다리 아저씨’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연결된다. 정체가 드러났을 때, 그것이 로맨스로 수렴되는 방식은 전형적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줄리의 성장 서사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자기 자신’으로 우뚝 선 상태에서 사랑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유를 향한 한 걸음 – 여성이 꿈꾸는 세계

『키다리 아저씨』가 출간된 1912년, 미국은 여전히 여성에게 폐쇄적인 사회였다. 교육의 기회, 직업의 선택, 연애와 결혼의 주도권까지, 모든 것이 제약된 구조였다. 그런 시대에 ‘여성 고아’가 대학에 진학하고, 문학을 공부하며,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글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

줄리는 단순히 공부 잘하고 예쁜 여자아이가 아니다. 그녀는 기성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며, 지적인 갈증을 느끼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세상을 배우고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이다. 그녀가 점점 더 글을 잘 쓰게 되고,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공감하게 되며, 자신이 받은 도움을 세상에 환원하고 싶어 하는 장면들을 보며, 나는 이 작품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초기 목소리 중 하나라고 느꼈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키다리 아저씨』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고아 소녀의 로맨스’가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려는 한 인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관계, 성장 – 우리 모두의 편지

『키다리 아저씨』를 다 읽고 나서, 나는 내 삶에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솔직하고 길고 따뜻한 편지를 써본 적이 있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SNS로 빠르게 소통하고,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압축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줄리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심으로 풀어낸다면, 우리 관계도 조금은 더 깊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줄리의 편지는 단지 ‘보고’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를 맺는 방식이고, 자신을 정리하는 작업이며, 무엇보다 성장의 기록이다. 나는 그녀의 편지를 읽으며 웃었고, 공감했고, 울컥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혹은 내 미래의 나에게라도 이런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마무리하며 – 나만의 키다리 아저씨를 떠올리며

『키다리 아저씨』는 표면적으로는 한 명의 후원자와 한 명의 고아 소녀 이야기지만, 그 이면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녹아 있다. 성장, 자유, 사랑, 주체성, 여성의 독립, 글쓰기의 힘, 관계의 본질. 나는 이 책을 단순한 고전이 아니라, 아주 개인적이고 내밀한 문학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구에게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내 삶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던가? 아니, 어쩌면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내 인생에서 나 자신의 키다리 아저지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