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이방인』의 첫 문장은 너무도 담담하게 시작된다. 어머니의 죽음을 ‘그저 그런 일상’처럼 말하는 주인공 뫼르소의 어조는 독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어떻게 이런 말이 가능할까?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나는 이 질문이 엇나간 것임을 깨달았다. 뫼르소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방인』은 말 그대로 ‘타자’의 이야기다. 인간 사회라는 커뮤니티에서, 하나의 규범이나 정서에서 벗어난 자의 이야기. 그러나 단순히 ‘이질적인 사람’이 아닌, 철저하게 세상과 불화하지 않고, 스스로를 포장하지 않으며, 진실하게 살아가려 한 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방인』 –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끝내 침묵하는 자
많은 독자들이 뫼르소를 오해한다. 그는 무감정하고, 비인간적이며, 삶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그를 정반대로 느꼈다. 뫼르소는 위선적이지 않았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연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그는 울지 않았다. 뙤약볕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셨다. 누군가는 그것이 비정하다고 느꼈겠지만, 나는 오히려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왜 ‘슬퍼 보여야만’ 슬픔을 느낀다고 믿는 걸까? 그 슬픔이 꼭 울음으로만 표현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뫼르소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 감정을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사회가 정한 프레임 안에서만 해석하려 한다. 울면 슬프고, 웃으면 기쁘고, 고개를 끄덕이면 동의했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러한 감정의 체계를 거부했다. 그 때문에 그는 끝내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양’이라는 부조리, 그리고 인간의 조건
이 소설에서 가장 기이한 장면은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이다. 그는 아무런 명분 없이, 단지 “태양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긴다. 이 장면은 작가 알베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absurde)’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살인이라는 중대한 행위가, 그 어떤 도덕적 동기나 감정적 정당화 없이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생 자체가 원래 그렇지 않은가?
세상은 종종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좋은 사람이 죽고, 악인이 승리하며, 이유 없이 사랑이 떠나간다. 카뮈는 이런 세계를 ‘부조리하다’고 표현했다. 이성과 도덕, 정의로 설명될 수 없는 삶의 불합리함. 『이방인』은 바로 그 부조리를, 말 그대로 ‘몸으로’ 살아내는 한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뫼르소는 태양 아래서 총을 쐈다. 그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무언의 반응이었다. 세상이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으니, 나 또한 그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 카뮈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죽음을 앞둔 진실함
재판은 단순히 뫼르소의 살인을 심판하는 장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얼마나 쉽게 낙인을 찍는지를 보여주는 무대다. 판사와 배심원들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인 ‘무표정함’을 문제 삼는다. 그는 살인을 저지른 죄보다, 슬퍼하지 않은 죄로 더 비난받는다. 사회는 그의 행동보다는 그의 태도에 분노한다.
나는 이 대목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보다 태도를 더 문제 삼을 때가 많다. 예의 바르지 않으면 무례하다 하고, 슬퍼 보이지 않으면 냉혈한이라 부른다. 진실보다 이미지가 중요하고, 사실보다 태도가 우선시되는 세상. 뫼르소는 그런 세상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후, 뫼르소는 오히려 평온해진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인생을 진심으로 느낀다. 그는 말한다. “나는 모든 것이 다 잘됐다고, 그 누구도, 심지어 엄마조차도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고 느꼈다.” 뫼르소는 결국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였고, 그 속에서 자유로워졌다. 그 자유는 죽음과 맞닿아 있었지만, 동시에 삶에 가장 가까운 순간이었다.
카뮈가 말한 인간, 그리고 나 자신
『이방인』을 읽고 나는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뫼르소처럼 살아간다는 건 가능할까? 아니, 그렇게 살 용기가 있는가?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얽매여 살아간다. 그러나 카뮈는 말한다. “세상은 본래 의미가 없다. 그 안에서 우리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뫼르소는 무의미한 세계를 인정했고, 그 속에서 억지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진실되게 살았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존엄한 삶’일지도 모른다.
나는 뫼르소를 존경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세상의 이방인이었지만, 스스로에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이방인』은 내게 그 어떤 책보다 더 깊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지금, 진실하게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