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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버멘쉬』, 니체가 던진 외침 – 신이 죽은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by rya-rya-day 2025. 4. 11.

위버멘쉬 책 관련 사진
위버멘쉬 책 사진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은 언제나 우리를 ‘혼자 있는 사유의 방’으로 이끈다. 그중에서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등장하는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 개념은 나에게 가장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 개념 중 하나다.

위버멘쉬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인간형이며, 동시에 삶의 태도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니체는 아주 강력하고도 외로운 질문을 던진다.
“신이 죽은 세상에서, 너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사실상 신은 없다. 도덕은 상대적이며, 윤리는 유행처럼 바뀌고, 정의는 플랫폼의 알고리즘 안에서 흔들린다.
그런 혼란 속에서 니체는 고요하지만 강하게 외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위버멘쉬: 니체가 던진 외침 – 신이 죽은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단순한 철학서가 아니다. 그것은 예언서와 시, 고백과 선포가 혼합된 독특한 형식의 문학이다. 이 책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10년간의 고독을 끝내고 인간들에게 내려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 말은 단지 종교적 의미만은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 기준의 종말이며, 객관적 진리의 해체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은 방황한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신의 죽음을 견딜 수 없기에, 그 자리에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낸다.”
도덕, 민족, 제도, 대중 여론, 그리고 심지어 인간 그 자체가 우상이 된다. 하지만 니체는 그것마저 부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등장하는 것이 위버멘쉬다.
위버멘쉬는 신이 된 인간이 아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스스로의 의미를 창조해내는 인간이다.

인간은 다리다 – 동물이 아닌, 초인으로 향하는 다리

니체는 인간을 동물과 초인 사이의 ‘다리’로 묘사한다.
즉, 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극복과 성장의 과정을 살아가는 존재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그 다리를 건넌 자다.

우리는 매일을 살아가며 수많은 결정과 충돌 속에서 선택한다.
그 선택들이 반복되면 정체성이 되고, 삶의 방향이 된다.
하지만 그 선택이 과연 ‘내’가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심어준 환상 속에서 결정된 것인지 묻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위버멘쉬의 길 초입에 선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 멈췄다.
내 삶은 얼마나 내 것이었나?
내 신념은 과연 나의 내면에서 피어난 것일까?
아니면 시대의 목소리, 타인의 시선, 부모의 기대, 친구들의 동조 속에서 길들여진 결과일 뿐일까?

니체는 그런 질문을 피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말없이, 하지만 단호하게 외친다.
“그대는 자신을 창조해야 한다.”

초인의 삶은 고독하며, 예외적이며, 반복을 감내한다

위버멘쉬가 되기 위한 여정은 쉬운 길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기존의 가치와 충돌하며, 대중으로부터 오해받고 고립된다.
하지만 그 고독은 필연이다.
왜냐하면 위버멘쉬는 자기만의 윤리와 미학을 만들어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또한 ‘영원회귀(Ewige Wiederkehr)’를 말한다.
그것은 지금 이 삶이 끝없이 반복된다고 가정해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삶을 다시 한 번, 영원히 똑같이 반복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오래도록 숨이 막혔다.
내가 지금의 삶을 그대로 다시 살아야 한다면, 나는 과연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과연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견디고 있는가?

초인의 삶은 반복되는 삶조차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완전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후회를 남기지 않고, 의미를 외부에 맡기지 않으며, 고통조차도 자기 삶의 일부로 껴안는다.

위버멘쉬는 자유롭지만, 방종하지 않다

니체 철학을 오독하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저지르는 오류 중 하나는,
초인을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 혹은 ‘도덕을 초월한 독재자’로 오해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는 방종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자기 절제에서 비롯된다.

초인은 자기를 속이지 않는다.
그는 자기 안의 약함을 직면하고, 욕망을 가공하지 않으며,
자기 안의 모순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조화를 이끌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강한 자가 아니라, 가장 진실한 자다.

그의 삶에는 외침이 없다.
그는 외로운 산의 정상에서 묵묵히 길을 만든다.
그리고 뒤따르는 자들에게 어떤 설명도 남기지 않는다.
그저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 자체가 이정표가 된다.

오늘의 시대, 위버멘쉬는 왜 더 절실한가

현대 사회는 ‘너답게 살아라’고 외친다.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들고, 닮도록 강요한다.
‘자기다움’이라는 말조차도 하나의 마케팅 언어가 되어버린 세상.
그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자기를 잃어간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그런 시대를 향해 날것의 언어로 말한다.

“자기 자신을 넘어라.
타인을 닮으려 하지 말고,
타인의 도덕을 빌려오지 말고,
네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하라.”

나는 이 말이 너무도 두렵고, 동시에 간절했다.
나는 이제껏 너무 많은 기준을 외부에서 빌려왔다.
‘성공’, ‘행복’, ‘가치’라는 단어의 정의를 남에게 맡긴 채 살아왔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늘 불안했고, 허전했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흔들리고만 있었다.

니체는 그런 나에게 말했다.
“그대의 내면을 바라보라. 초인은 그 안에서 태어난다.”

마무리하며 – 위버멘쉬는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걷는 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리고 그 안의 위버멘쉬 개념은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철학을 넘어서, 하나의 삶의 선언이다.

위버멘쉬는 완성된 인간이 아니다.
그는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재구성하고, 의미를 창조하고, 고통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인간이다.
그는 끊임없이 묻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며 나아간다.
그는 스스로의 신이 되기를 택한 인간이다.

나는 여전히 위버멘쉬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방향을 안다.
그리고 그 길을 걷기 시작한 지금,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네가 걷는 길이 곧 네가 되는 존재다.”

위버멘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그는 지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안에서 깨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