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한강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었을 때, 나는 마치 어딘가 차가운 물 속에 조용히 잠긴 느낌이었다.
삶의 온도는 36.5도라지만, 이 책 속 문장들은 그보다 더 서늘한, 그러나 놀랍도록 부드럽고 정직한 체온을 갖고 있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나는 오랫동안 어떤 문장 하나를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그것은 너무 작고, 너무 조용해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이 문장 하나로 나는 한강의 세계 안으로, 조용히, 그러나 완전히 들어가 버렸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잃어버린 감각을 건네는 문장의 온도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한강 작가가 1990년대 초중반에 발표한 시들을 모은 시집이다.
하지만 이 시집은 단순한 ‘초기작의 아카이브’가 아니다.
오히려 한강 문학의 뿌리, 혹은 감정의 최초의 진동에 가까운 기록이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마치 오래된 상자 속 편지를 꺼내 읽는 느낌이 든다.
어디선가 한때는 분명 생생했을 말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된 감정들.
그것들이 이 시집에는 담겨 있다.
말하지 못한 말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슬픔, 쏟지 못한 눈물, 그리고 꾹 눌러 삼킨 기쁨조차도…
그런 감정들이 문장 사이에 묻혀 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잔해들을 애써 끌어안는다.
“나는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 존재의 감각, 부재의 정체성
한강의 시를 읽다 보면 유독 '비어 있음'과 '없음'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사람들은 보통 무언가를 가지려 하고, 채우려 하며, 꽉 찬 무언가를 갈망한다.
하지만 한강은 그 반대다.
그녀는 ‘비어 있음’ 자체를 있는 그대로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빈틈 속에서 우리 존재의 윤곽을 찾아낸다.
“나는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바다가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시구를 만났을 때, 나는 멈춰 서서 문장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어떻게 이런 말이 가능할까?
어떻게 공허가 이렇게 아름답게 들릴 수 있을까?
비어 있다는 것은 슬픔일 수도 있고, 가능성일 수도 있다.
한강은 바로 그 모호한 감정의 지점에 문장을 세운다.
마치 바람이 스치는 들판처럼, 혹은 물결이 흔들리는 새벽처럼.
그건 침묵과도 닮아 있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사실, 침묵으로 말하는 시집이다.
서랍, 저녁, 그리고 시간의 구조
이 책의 제목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한 편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이상한 문장이다.
왜 서랍에 저녁을 넣을까?
저녁은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서랍은 시간의 그릇이 아닌데.
하지만 이 제목이 바로 한강 문학의 매혹을 응축하고 있다.
물성과 감정, 공간과 시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
서랍은 그저 물건을 넣는 공간이 아니라, 잃어버린 감정을 숨겨 놓는 내면의 장소이고,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라, 감정의 잔해들이 굴절된 색채다.
그렇게 이 시집은, 물리적 세계의 법칙을 슬며시 어긴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과장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책의 힘이다.
삶의 부스러기 속에서 피어난 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짧다.
짧고 조용하며,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짧은 문장들 안에는 수많은 감각들이 진동하고 있다.
한 문장 안에 계절과 시간과 기억과 냄새가 함께 들어 있다.
“봄이 오지 않는 날에도
꽃은 젖는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슬픔,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된 종류의 감정이 밀려왔다.
이 시집의 시들은 그런 식이다.
설명하지 않지만, 모든 걸 느끼게 한다.
숨겨진 감정의 구조물들이 무너지듯 다가온다.
그리고 끝내, 나도 모르게 울고 만다.
‘한강’이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슬픔과 아름다움
나는 가끔 ‘한강’이라는 이름 자체가 한 편의 시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시간, 부재, 고요, 상실, 감각의 흔들림 같은 키워드가 중심에 있다.
그리고 이 시집은 그런 한강 문학의 정수를 가장 농밀하게 담고 있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희랍어 시간』 등의 소설에서 우리는 한강의 윤리적 상상력과 고통에 대한 직면을 보았다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는 그 감정의 원형, 언어 이전의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집은 마치, 그 후의 소설들이 자라난 뿌리이자 심장이다.
그녀의 문장은 아프도록 조용하다.
그리고 묘하게 따뜻하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고통을 감각하되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고통을 언어로 감쌀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무리하며 – 이 시집은 당신의 잊혀진 저녁을 꺼내줄 것이다
나는 이 시집을 다 읽고 난 뒤, 한동안 침묵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이 시들보다 더 조심스러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책을 품에 안았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상실에 대한 책이지만, 동시에 기억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 자주 무언가를 잃고, 그 잃어버림을 잊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시집은 말한다.
“당신이 잃어버린 저녁이, 아직 서랍 속에 남아 있다면요?”
그 말에 나는 멈췄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닫아 두었던 서랍,
그 속에 아직 열어보지 못한 감정 하나가 남아 있었던 건 아닐까?
이 시집은 그 서랍을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어준다.
그 속에 넣어둔 슬픔, 후회, 혹은 아주 오래전의 사랑까지도,
말없이 꺼내어, 조용히 당신의 손에 쥐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