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모비딕』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하나의 거대한 ‘모험소설’을 기대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사내들의 항해, 흰 고래를 둘러싼 치열한 추격전, 풍랑과 폭풍, 선박의 비명과 선원들의 거친 숨소리. 그러나 몇 장을 넘기자마자 나는 금세 깨달았다. 이 책은 단순한 고래잡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끝내 설명하지 못하는 세계, 우리 내면의 어둠, 집착과 운명, 신과 허무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존재의 수수께끼를 좇는 정신의 항해였다.
『모비딕』은 읽을수록 바다가 아닌, 인간의 내면으로 깊이 잠수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에이허브 선장'이라는 폭풍 같은 인물이 있다. 그는 모비딕이라는 흰 고래를 쫓지만, 사실은 그 고래 너머에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모비딕』 – 고래를 쫓는 인간, 혹은 인간을 쫓는 고래
에이허브는 다리를 잃었다. 모비딕에게 물려, 목숨 대신 한쪽 다리를 잃었다. 많은 이들은 그것을 단순한 사고, 운명의 장난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고래에게 복수해야 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고래에게 상징된 무언가’에 대항해야 했다.
에이허브는 단순한 선장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고통, 원한, 질문, 불만, 존재의 고독을 모두 짊어진 자다. 모비딕은 단지 동물이 아니라, 에이허브에게는 세상을 지배하는 어떤 원리, 설명할 수 없는 폭력, 혹은 신에 가까운 존재다. 그가 고래에게 던지는 작살은 단지 복수심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반항이다. “왜 나인가?”, “왜 이런 고통을 주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부순단 말인가?”
나는 에이허브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다. 우리도 때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불행을 겪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꿈을 놓치고, 이유 없는 절망에 빠진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원망한다. 이성은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감정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에이허브는 그런 감정의 화신이었다. 그는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이슈메일, 관찰자이자 우리 자신
이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은 작품의 서두에서 “나를 이슈메일이라 부르라”고 말한다. 그는 명확한 정체성을 지우고 독자의 자아를 투사하는 거울 같은 존재다. 그는 우리처럼 모험을 찾아 나섰고, 그 여정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바라본다.
이슈메일은 에이허브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는 에이허브를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기록하고, 설명하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점에서 그는 이 소설의 유일한 ‘이성’이며, 동시에 유일한 생존자다. 그것은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광기와 집착이 세상을 파괴할 때, 끝까지 남는 것은 관찰하고 사유한 자라고.
모비딕, 고래인가? 신인가? 공허인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바로 그 흰 고래, 모비딕이다. 그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하지 않음에도, 이야기 전체를 지배한다. 그는 신처럼 보이지 않지만, 신보다 더 강력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는 물리적 실체이면서도, 관념의 결정체다.
나는 읽는 내내 이 고래가 정말 실제하는 존재인지조차 의심했다. 에이허브가 만든 망상은 아닐까? 혹은 모두의 불안을 투사한 환영은 아닐까? 흰색은 순수함이 아니라 공허함을 상징하고, 그 공허는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을 상기시킨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태양 아래서 무감각하게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모비딕』 속 고래도 삶을 향한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모비딕은 침묵한다. 그는 존재하지만 말하지 않고, 눈앞에 있지만 도달할 수 없다. 신이 침묵할 때,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에이허브는 그 앞에서 절망했고, 그 절망은 결국 파멸로 향했다. 그러니 모비딕은 신이면서 동시에 허무 그 자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허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대양처럼 깊은 질문, 소설의 무게
『모비딕』을 읽는다는 건, 단지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유 체험이다. 작가는 바다와 고래, 선원들의 일상, 해양 생물학, 종교, 철학, 심지어 고래 뼈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쏟아낸다. 때로는 압도적이고, 숨 막히며, 길고 지루하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매력이다. 삶은 늘 흥미진진한 것만은 아니며, 그 안에는 무수한 정보와 맥락, 의미 없는 순간들이 공존한다.
멜빌은 삶의 리듬을 그대로 소설로 옮겼다. 그러니 이 책은 단순한 ‘줄거리’로 평가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이며,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삶의 축소판이다.
나는 어떤 고래를 좇고 있는가
책을 덮은 후, 가장 오래도록 내 안에 남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는 지금 어떤 고래를 좇고 있는가?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의 ‘모비딕’이 있다. 누군가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 누군가는 잊지 못한 과거, 누군가는 세상이 준 상처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고래를 어떻게 쫓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지배당할 것인가, 아니면 관찰할 것인가?
에이허브처럼 모든 것을 잃으며 돌진할 것인가, 이슈메일처럼 질문하며 살아남을 것인가. 그 선택은 언제나 우리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