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마중도 배웅도 없이』 –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날, 시는 나를 기다려주었다

by rya-rya-day 2025. 4. 12.

마중도 배웅도 없이 책 관련 사진
마중도 배웅도 없이 책 사진

처음 『마중도 배웅도 없이』라는 제목을 마주했을 때, 나는 이미 마음 한구석이 스르륵 젖어들었다.
“그래, 인생이란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몰라.”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줄 것 같지도 않고, 어딘가 떠나는 순간에도 배웅받지 못하는 삶.
그런 무수한 순간들을 박준 시인은 정말 조용하고, 낮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박준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감정’을 들킨 기분이 든다.
이번 시집도 그랬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는 삶과 죽음, 관계와 이별, 그리고 잊힘의 감각을 다룬다.
그러나 슬픔을 밀어붙이지 않고, 작고 사적인 말투로 속삭인다.
그래서 더 오래 아프고, 그래서 더 따뜻하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날, 시는 나를 기다려주었다

박준의 시는 언제나 남아 있는 사람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그는 떠나는 사람보다, 남아 있기로 한 사람의 고요한 고통과 체념, 그리고 때때로 찾아오는 쓸쓸한 용기를 보여준다.

“당신이 떠난 그 자리엔 / 말린 국화가 놓여 있었다.”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말린 국화. 죽은 꽃이다. 하지만 여전히 ‘놓여 있는’ 존재다.
어쩌면 이 말린 국화는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이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 비워진 자리에서 떠나지 못한 사람.

박준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을 위한 시를 쓴다.
힘을 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그래도 여기에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 조용히 곱씹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지켜주는 문장들이 이 시집 가득 담겨 있다.

시는 결국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는 유독 죽음과 삶 사이의 이야기가 많다.
시인 스스로 이 시집을 ‘떠나간 이들과의 대화’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오히려 이 시집을 통해 남은 사람들, 여전히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더 진하게 느꼈다.

박준의 시는 죽음을 절대 무겁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삶과 나란히 앉은 존재’처럼 묘사한다.
그래서 시는 유난히 낮은 목소리를 띤다.
거창한 언어 대신, 삶 속 흔한 단어들로 죽음을 받아들이게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시에서,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입고 온 검정 코트와 그 안주머니에 남겨진 영수증을 이야기한다.
그 영수증은 “생전에 함께했던 치킨 한 마리”의 흔적이었다.
슬픔은 이렇게 조용하게 다가온다.
기억은 결국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 속 작은 것들에 붙어 있다.

이 시집을 읽으며 자꾸 ‘누구’가 떠올랐다

박준의 시는 어떤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그 보편성은 거창한 메시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고도 통하는 감정의 리듬에서 비롯된다.
읽다 보면 누구나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떠나간 가족, 사랑했던 사람, 혹은 그냥 잊힌 누군가.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오래전 세상을 떠난 할머니가 생각났다.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간,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정리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박준의 시 속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건 눈물이라는 형태로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오래된 가을날의 냄새처럼,
낙엽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너무 조용히 스며들었다.

‘당신’이라는 단어의 힘

박준 시인의 시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당신’이다.
그 ‘당신’은 특정한 사람일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일 수도 있으며,
혹은 독자 자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단어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건 부르기 위해 오랜 시간 입 안에서 굴려야 하는 이름이며,
어쩌면 한 사람을 다 담고도 모자라는 그릇 같은 단어다.

“당신이 있었던 자리에 나는 잠시 머물렀습니다.”
“당신이 없지만 나는 오늘도 당신의 날씨로 살아갑니다.”

그 ‘당신’이 이 시집 전체를 흐르고 있다.
그건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애틋함일 수도 있다.
결국 그 ‘당신’은 시인이 세상에 보내는 가장 간절한 질문처럼 느껴진다.
“거기, 괜찮으세요?”

마중도 배웅도 없이, 그러나 ‘기다림’은 있다

책 제목은 ‘마중도 배웅도 없이’지만,
나는 이 시집 안에서 계속 ‘기다림’을 느꼈다.
보이지 않게, 말하지 않게, 어쩌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감정.

그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체념과 받아들임에 가깝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은 누군가에겐 치유였고,
또 누군가에겐 이별의 시작이었다.

박준 시인은 마중도, 배웅도 없지만
“함께 지나간 시간의 온도는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시간들을 담담히 품고 있는 이 시집은,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따뜻하다.

마무리하며 – 박준의 시는 삶의 뒷모습을 비춘다

박준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감정을 조용히 꺼내어 놓는 행위다.
그건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대단히 정직해야 가능한 일이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는 누군가에게는 작별 인사의 시집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잊힌 관계를 다시 마주보게 하는 거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처럼 누군가에게는
그저 조용히 옆에 있어주는 친구 같은 책이 될 수 있다.

이 시집은 묻지 않는다.
다그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내셨군요.
그래요,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