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노인, 물고기, 해와 별, 뱃사공과 맨손의 사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이렇게 몇 가지 단순한 요소만으로도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는 걸작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단순히 '고기 잡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작품은 겉으로는 단순하고, 서술은 건조하지만, 그 안에는 한 인간의 인생 전체가, 그리고 인간 존재의 존엄과 허무가, 고요하면서도 장엄하게 녹아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중학생이었다. “노인이 물고기를 잡다 만 이야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는 완전히 다른 책이었다. 그것은 고독과 싸우는 이야기였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법을 말하는 책이었으며, 지는 싸움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지침서였다.
『노인과 바다』 – 지는 싸움에도 굴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
주인공 산티아고는 노인이다. 운도, 체력도, 사회적 관계도 잃어버린 사람이다. 84일 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그를 사람들은 ‘운 없는 노인’이라 조롱한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낡은 배와 낡은 몸을 이끌고 다시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멀리 나가, 거대한 청새치와 마주한다.
이 거대한 물고기와의 싸움은 단순한 생계의 문제나 낚시의 성공 여부가 아니다. 그것은 산티아고가 다시 한 번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이다. 그는 말한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이 대사를 읽는 순간,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누군가에겐 허세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야말로 산티아고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삶이란 매일의 실패 속에서도 다시 한번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설령 결과가 허무할지라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다.
고독과의 항해, 그리고 침묵의 연대
이 작품을 읽다 보면 ‘고독’이 거의 또 하나의 인물처럼 느껴진다. 산티아고는 대화 상대가 없다. 그와 함께 배를 탔던 소년 마놀린은 노인의 운이 나쁘다는 이유로 다른 배로 옮겨 탔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그는 오직 자신과 바다, 그리고 그 속의 고기와 싸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소설은 외롭지 않다. 오히려 어떤 장면에서는 묘한 평화와 유대를 느낀다. 산티아고는 물고기에게 “형제여”라고 말하고, 바다를 “여인”이라 부른다. 그는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그들과 교감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마치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이 떠올랐다. 인간이란 세계 안에서 존재하며, 그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규정한다는 생각. 산티아고는 고독 속에서 세상과 가장 가까워진다.
물고기와의 싸움, 혹은 인간과 운명의 사투
청새치를 낚은 이후, 산티아고는 거의 3일 밤낮을 물고기와 함께한다. 그는 물고기를 찔러 죽이지 않는다. 그건 단순한 사냥이 아니다. 그는 물고기와 동등한 존재로 싸운다. 물고기의 힘, 아름다움, 지구력에 감탄하며, 자신의 고통과 무력함도 받아들인다. 물고기와의 싸움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된다.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잡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 떼들이 그의 ‘전리품’을 갉아먹는다. 그는 작살로, 노로, 심지어 노끈으로 상어들과 싸우지만, 결국 청새치는 앙상한 뼈만 남는다. 이 장면은 참혹하다. 그가 피땀 흘려 얻은 모든 결과물이 산산이 부서진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말없이 노를 젓고, 다시 해변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 장면에서 삶의 진짜 얼굴을 봤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싸우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불확실하다. 심지어는 눈앞에서 무너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끝까지 싸웠는가, 자기 자신을 지켰는가이다. 그 싸움의 자세 자체가 인간을 빛나게 만든다.
패배의 미학,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
마을로 돌아온 산티아고는 거의 쓰러진 상태다. 사람들은 거대한 물고기의 뼈를 보고 놀라지만, 아무도 그의 싸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소년 마놀린만이 노인을 걱정하고, 다시 함께 배를 타자고 한다. 이 장면은 이 작품의 유일한 ‘희망’으로 읽힌다.
헤밍웨이는 산티아고를 영웅처럼 그리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영웅이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자이며, 그 안에서 다시 일어나려는 자다. 『노인과 바다』는 승리의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명백한 패배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패배를 받아들이는 방식, 그 안에서 보여주는 끈기와 고요한 자존감이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든다.
나에게 바다는 어디이며, 나는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가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에게 ‘바다’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무엇과 싸우고 있으며, 무엇을 끝내 지키려 애쓰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산티아고’다. 삶이라는 바다에 나아가, 보이지 않는 물고기를 찾아 헤맨다. 때론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어떤 날엔 오히려 잃어버린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나는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그런 싸움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배웠다.
그 싸움은 화려하지 않고, 결과도 확실하지 않지만, 그 싸움을 멈추지 않는 태도 자체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