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는 마시는 것이라기보다, 살아내는 것에 가깝다. 특히 교토에서의 커피라면 더더욱 그렇다. 심재범 작가의 『교토 커피』를 읽으며 나는 단순한 커피의 향을 넘어선 어떤 철학, 삶의 태도, 그리고 사색의 결을 느꼈다. 이 책은 결코 커피에 관한 책만이 아니다. 여행기도 아니고, 단순한 에세이도 아니다. 이것은 삶을 천천히 바라보는 연습, 혹은 한 잔의 커피에 세계를 담아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다 보면 묘하게 조용해진다. 마치 교토의 골목을 걷는 듯한 착각, 아니 그곳의 시간 위에 잠시 발을 들인 듯한 착각 속에서 독자는 점점 느려진다. 시끄럽고 복잡한 카페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단 하나의 여백이 이 책엔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여백이 『교토 커피』의 본질이다.
교토 커피, 느림을 마시는 법, 혹은 삶을 다시 추출하는 법
책은 커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커피는 메뉴판의 리스트가 아니고, 원두의 종류도 아니며, 심지어 추출법이나 레시피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분위기의 비유, 혹은 한 도시의 속도와 리듬에 대한 상징이다. 교토의 커피는 그 자체로 공간이며, 기억이며, 철학이다.
심재범 작가는 말한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교토에 간다.” 이 말은 언뜻 허세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책을 읽다 보면 곧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교토라는 도시가 가진 시간의 흐름과 커피라는 행위는 묘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효율을 따르지 않고, 대량 소비를 노리지 않으며, 그저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교토의 커피는 말하자면 ‘행위로서의 느림’이다. 천천히 추출되고, 조용히 마시고, 오래 기억되는 맛. 그런 커피를 파는 공간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번잡한 BGM이 없고, 스태프가 과하게 말을 붙이지 않으며, 커피의 설명이 굳이 많지 않다. 그저, 그 공간이 가지고 있는 공기와 온도가 커피에 녹아 있다.
장소가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다시 공간을 채운다
『교토 커피』의 큰 미덕 중 하나는 바로 공간 묘사다. 이 책에는 이름 있는 커피숍도 등장하고, 우연히 발견한 작은 가게도 등장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공간이 가진 기분이다.
예를 들어 ‘카페 티에라’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그 공간을 지키는 노인의 느긋함, 말수가 적은 커피잔, 그리고 시간이 멈춘 듯한 분위기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카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카페에서 느낀 감정의 파장을 기억하게 된다.
심 작가는 그 공간에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멀찍이서 바라보며, 마치 한 장의 흑백 사진처럼 순간을 기억한다. 그는 말한다. “교토에서는 커피가 아니라, 공간이 주는 여백을 마신다.” 나는 이 구절을 여러 번 곱씹었다. 커피가 맛있든 없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어떤 자리에 앉아 있었고, 어떤 계절의 공기였고, 어떤 식의 침묵이 흘렀는지. 결국 커피는 그런 기억의 열쇠였던 것이다.
교토라는 도시가 건네는 시간
심재범 작가는 교토에 대해 말할 때 ‘관광지’라는 단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그는 기요미즈데라나 긴카쿠지 같은 유명한 장소보다는, 동네 슈퍼와 오래된 골목, 주택가의 전봇대, 우체통을 언급한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몸이 느끼는 시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교토는 빠르지 않다. 아니, 아예 느림을 선택한 도시에 가깝다. 물론 발전은 하지만, 정체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되 고유의 호흡을 지켜낸다. 그 리듬이 바로 ‘교토 커피’의 리듬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교토의 아침 풍경을 상상했다. 아직 가게들이 열지 않은 시간, 자전거가 몇 대 지나가고, 노인이 천천히 신문을 들고 걷는 거리. 그 안에 내가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삶. 『교토 커피』는 그런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단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도 그런 시간이 흐를 수 있다고 조용히 다독인다.
한국의 속도에서 도망치고 싶은 날, 이 책을 연다
한국에서 커피는 ‘에너지’다. 아침잠을 깨우는 기능이고, 회의 전에 들이키는 연료며, 일과 사이 잠깐의 틈을 메우는 촉진제다. 카페는 작업 공간이 되었고, 커피는 일과 생산성의 상징처럼 변했다. 나 또한 그 안에 있었다. 카페인을 들이켜며 일하고, 노트북을 펴고, 집중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교토 커피』는 그런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커피를 ‘맛’으로 기억한 게 언제인가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맛보다는 ‘기능’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내게 새로운 커피를 건넨다. “지금 이 한 잔을 천천히 마셔보세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곧, 자신을 마시는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이 말을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커피는 조금 달라졌다.
이 책은 여행이 아니라, 머물기에 대한 이야기다
『교토 커피』를 여행 에세이로 기대한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른다. 관광지도 소개하지 않고, 루트도 없고, 맛집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무언가를 ‘보기’ 위한 책이 아니라, 무언가를 ‘지켜보는’ 책이다.
길을 걷다가 들어간 조용한 카페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잔을 감싸쥐는 순간. 그런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책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나도 이런 여행을 하고 싶었다. 시간과 일정을 채우는 여행이 아니라, 나를 비우는 여행. 계획을 세우는 여행이 아니라, 우연에 몸을 맡기는 여행.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나 자신을 조금 더 알아보는, 그런 조용한 여정.
마무리하며 – 결국 ‘교토 커피’는 내 안에도 있다
『교토 커피』를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디에서 나만의 교토 커피를 마시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잠시라도 놓아주는 순간, 삶을 천천히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침묵과 여백을 허용하는 마음가짐에 관한 질문이다.
어쩌면 교토는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커피는 그 감각을 깨우는 매개. 우리는 모두, 속도에 지쳐 어딘가로 숨어들고 싶어질 때, 이 책을 꺼내면 된다. 그리고 조용히 책을 펼치며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잠시 멈춰도 괜찮아. 지금 이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니까.”